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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니고 있는 안정적인 회사를 왜 그만두고 스타트업으로 가냐고 한 달 가까이 아내와 씨름했었는데, 겨우 설득에 성공하고 이직한 지 4주 차.. 첫 3일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 회사가 생각조차 나질 않습니다.
그 이유를 하나씩 나열해보려고 합니다.
회사나 사람이 특정될 수 있기 때문에 약간의 각색이 들어가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방식

이전 회사에 있을 때, 어떤 업무를 위해 슬랙으로 A팀의 담당자 B에게 DM을 보내면 높은 확률로 "그건 C팀 일입니다" 또는 "D님에게 문의해보세요" 등의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C팀의 누군가에게 동일하게 물어보면 "그건 저희 팀 E님이 알고 계실 거에요"라는 답이 오고, E님에게 물어보면 "그거 A팀 일인데요?"라는 답이 오고.. 핑퐁을 엄청나게 주고받은 뒤에야 겨우 해결이 되거나, 그래도 해결이 안 되어서 메일에 담당님, 팀장님 참조 넣어서 요청하거나, 정말 간단하고 단순한 일인데 사업팀에 설명하고 Jira 티켓을 통해 정식으로 요청한 적도 있습니다. 그나마 실제 담당팀과 담당자를 알려주는 답이 있으면 다행이고 가끔 며칠 뒤에 리마인드를 줘야지만 답을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같은 팀 내에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던 일들이 다른 팀과 협업할 땐 수도 없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모든 분들이 그랬던 건 아니고 안 좋았던 기억이 오래가기 때문에..)

 

현재 회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총무역할을 하는 분이 하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DM을 보냈습니다. 조금 뒤에 답변이 왔습니다. "그건 재무 쪽이라 F님이 담당하시는데요, 제가 문의해서 확인한 후 전달드릴게요." 그리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OO님, F님이 이렇게 처리해주신다고 합니다." 라고 답이 왔습니다. 저는 제가 허브가 되어 핑퐁 칠 필요 없이 담당자도 아닌 분께 질문을 해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사원증이 나왔는데 재택근무 중이라 수령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오고 다음 주가 되어서야 담당자를 찾아갔으나 자리에 없어서 역시나 DM을 남겨두었습니다. "OO님, 안녕하세요. 출근해서 자리에 갔었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임시 사원증 반납 및 신규 사원증 수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질문하니 "뜨앗 헛걸음을 하셨네요. 제가 오후 중에 갖다 드리겠습니다. 임시 출입증을 책상 위에 올려놔주시면 감쪽같이 바꿔놓을게요!" 이런 답이 왔고, 안 그래도 임시 출입증은 항상 책상 위에 두었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답을 하고 신경을 안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갔는데 제 휴대폰에 슬랙 알림이 울려서 확인해보니 "찾아가는 서비스 완료하였습니다." 이렇게 메시지가 와있더군요. 자리에 돌아왔을 땐 임시 사원증 자리에 제 사원증이 놓여있었습니다.

 

담당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질문에 답을 해주기 위해 다른 분께 질문을 해서 원하는 답을 대신 얻어주고, 언제 제 자리로 오셔서 가져가세요가 아니라 직접 자리로 오셔서 바꿔주시는 모습에서 이 회사의 문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밖에 어떤 질문을 해도 아무리 바쁜 상황에서도 모두 자기의 바쁜 일을 제쳐 두고 친절하게 답을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회사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구성원이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문제 해결 방식

서비스 운영 중 에러가 발생하여 고객으로부터 문의가 들어왔고 확인하다가 원인을 파악했습니다. API 서버에서 다른 서버로 요청하고, 그 서버에서 3rd-party 서버로 요청한 뒤 응답을 수신했는데, 해당 응답이 정의되어있지 않은 응답이었고, 예외처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JSON이 규격에 맞게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각각을 A, B, C 서버라고 칭했을 때 A에서는 JSON 관련 예외처리가 제대로 안 되어있는 상황이고, B에서는 C의 응답에 대한 예외처리가 안 되어있는 상황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A서버는 B서버의 규격을 보고 만들었기 때문에 JSON에 대한 예외처리가 안 되어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 맞긴 하지만 B서버에서 규격에 맞게 응답을 내려주는 것이 우선적인 상황이었고, 더 나아가 C서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운영하는 상황이고 해당 에러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만 접수가 계속될 수 있는 상황에서 A 서버를 수정해 에러 문구만 상황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고 그렇게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수정하고 PR 단계에서 코드 리뷰를 하는데 CTO분의 의견이 달렸습니다. "B에서 규격에 맞지 않는 응답을 주고 있는데 왜 A를 수정하나요? A에서의 예외처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B 수정이 우선적이라고 판단됩니다." 이전 회사에서는 그 원인을 파악했더라도 서비스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수정하는 것이 우선되었기 때문에 지나고 나면 쓸데없는 예외처리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는데, 가장 바쁜 시기임에도 저런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먼저 제시해주셨기 때문에 쓸데없이 예외처리가 추가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분위기

면접 볼 당시에는 분명히 제 또래(?)가 많다고 하셨는데, 출근을 해보니 생각보다 굉장히 젊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제 또래 분들은 아무래도 육아도 신경 써야 해서 그런지 재택을 많이 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젊은 분들이 많다 보니 회사 내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네요. 처음에는 업무에 방해될까 걱정했었는데 벌써 적응해서 백색소음으로 생각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왁자지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자체가 좋은 사람들을 가려서 뽑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컬처 면접, 임원 면접 때도 프로세스가 긴 이유가 좋은 사람들을 가려 뽑기 위함이라고 양해를 구했었는데 100% 공감하기 때문에 전혀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려 뽑는 곳에 지원했고 잘 되어서 뽑힐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저 자신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도 있구요.

 

이곳에 다닌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정말 바쁜 일정 속에서도 얼굴 찌푸리는 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자체적으로 자정작용이 잘 지속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 회사에서는 한숨 푹푹 쉬고, 자리에서 쌍욕을 하는 분들도 가끔 있었고 저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커뮤니케이션하다가 화가 났을 때는 표정을 감추기가 어려웠었는데 여기서는 긍정적인 기운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복지와 근태

사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워낙 이전 회사가 복지와 자유로운 근태로 유명한 회사였고, 그 부분을 아내도 가장 좋아했었기에 연봉 협상 시에도 가장 열심히(?) 이야기했던 주제였습니다.

 

입사 전에 가정의 달이라 가족들 선물을 보내기 위해 주소를 조사하고 있다고 주소 공유를 부탁받았습니다. 저희 집, 본가, 처갓집 총 세 개의 주소를 전달했고, 입사하고 조금 지나서 모두 가정의 달 선물을 받았습니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장인, 장모님도, 아내도 선물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사내 문화에 힘쓰는 분들의 센스가 돋보이는 선물이었습니다.

 

장비도 가장 고가의 장비를 지원해줬고, 주변 기기 등을 장비지원금으로 충분히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종 이벤트가 자주 있는데, 벌써 순위권에 당첨된 적이 있고, 상품이 장비지원금 형태로 지급되어 정말 좋았습니다. 매달 지원되는 복지포인트가 따로 존재하고, 식사나 간식, 음료 관련해서는 일체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습니다.

 

건강 검진이나 그밖에 저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것들은 굳이 나열하지 않겠습니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회사가 잘 된다고 나몰라라 하지 않고 구성원을 적극적으로 챙기려는 태도와 방향성입니다.

 

사실 이런 복지에 대해서는 금전적으론 이전 회사가 더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구성원 한 명 한 명을 챙긴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명절, 생일 같은 날에 오히려 야박했고, 그냥 고정적인 복지포인트 자체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그것을 알아서 사용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근태의 경우 압도적으로 이전 회사가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다녀보니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모두 자유롭게 재택 또는 출근을 하고 있고, 휴가를 통보 형태로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도 동일하고, 무엇보다 재택-출근 간 전환 및 중간중간 휴게시간도 자유롭게 가질 수 있습니다. 딱 하나 차이 나는 것은 하루 업무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것인데, 그것도 8시간이 아닌 7시간 반입니다. 점심시간을 1시간 반 동안 천천히 가지면서 여유 있게 맛집을 다녀올 수도 있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수다 한참 떨다 들어와도 점심시간이 남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전 회사도 이런 부분은 자유로웠지만 2주 단위로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었는데, 바쁘지만 않다면 일은 덜(?)하고 돈은 더 받을 수 있는 상황이긴 해서 일단 좋았습니다.

 

데일리 스크럼

가장 맘에 드는 것 중 하나입니다. 데일리 스크럼을 자유롭게 참석 또는 불참할 수 있고 사람이 제법 많은데도 10분 안에 끝이 납니다. 각자 필요한 것들만 공유하고, 추가로 공유해야 할 것이 있다면 관계자만 남겨두고 모두 그 방을 나간 뒤에 진행이 됩니다. 이게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이전 회사에서는 하루에 회의만 3~4개 있는 날에는 업무를 아예 못 할 정도로 지나치게 회의가 잦고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도 같이 들어야벌서야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데일리 스크럼도 5~6명이서 아무리 짧아도 30분, 길 때는 2시간 이상 진행했는데, 오후 5시부터 진행해서 일찍 출근한 분들은 퇴근시간 이후에도 회의를 해야 하는 고통에 시달렸었습니다.

 

회사 구석구석에 포스터가 붙어있는데, "1시간 회의는 1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N명 X 1시간을 쓰는 것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처음 회사에 온 날, 저 문구를 보고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데일리 스크럼뿐만 아니라 다른 회의를 참여했을 때도 아직까진 30분을 넘긴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회의에 초대하기 전에 꼭 저의 의사를 먼저 물어봅니다. 제 스케줄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할 건데 참여할 것인지를 확인합니다. 

 

서비스와 향후 비전

이전 회사도 서비스 회사였고, 기존 서비스를 유지보수하면서 새로운 기능들을 개발하기도 하고, 신규 서비스 설계부터 런칭 직전까지를 경험해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하면서 항상 뭔가 결여된 느낌을 받았고, 이직의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는데 바로 오너십입니다. '이걸 누가 써?', '이걸 왜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한 번 생기기 시작하자 머릿속에서 사라질 생각을 안 하더군요. (제가 맡은 업무가 워낙 다양하고 맘에 안 드는 업무들이 포함되어있어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팀끼리 커뮤니케이션하고 의사 결정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그동안 회의만 계속하고.. '이러다 개발을 까먹는 거 아냐?'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서비스도 이전 회사의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하지만 기존에 개발하신 분들의 오너십과 애정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야근 수당도 없지만 마치 '내 새끼' 돌보듯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고, 잘 될 때 회사 전체가 환호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서 제가 오너십을 가질 수 있는 서비스를 런칭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후 기획하고 있는, 또는 다음 서비스 런칭을 준비 중인 서비스 또한 다수 있고, 이러한 것을 결정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다들 의욕적으로 업무를 진행하고, 빠르게 잘못한 뒤 빠르게 수정하는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모두 의사 결정자가 지므로 개발자에겐 부담이 전혀 가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어떤 서비스를 개발하게 되든 의욕적으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밖에도 회사 문화, 개발 문화, 위에서 설명하지 않은 회사를 대표하는 복지들이 많이 있지만, 짧게 다니고도 장점이 넘쳐나는 곳에 큰 결심을 내리고 온 것에 대해 너무 만족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블라인드 평점이 무려 4.54.7점 인 것도 결정을 쉽게 내리는 데 한몫했습니다.)

 

저는 번아웃도 겪고, 제가 맡은 업무에 대한 애정이 모두 식으면서 회사와 사람들(특히 팀원들)이 너무 좋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들이 많았고, 제가 마음이 떠났다고 느꼈을 때 이직을 결심하였습니다.

 

요즘 개발자분들은 정말 연락을 많이 받으실 텐데, 현재 회사의 네임밸류, 복지나 안정성 등도 정말 중요하겠지만, 일하는 방식이나 분위기, 서비스에 대한 애정 등 많은 것들을 고려해서 최선의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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